조선시대 안용복, 이규원,……독도를 개척하신 최초의 독도 주민 故최종덕씨, 독도 의용 수비대 모두 정말 대단한 분들이십니다. 이런 분들이 있기에 지금의 독도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런 분들의 내용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만나보세요..

안용복 장군은 수군에 들어가 능로군으로 근무하였다. 숙종 19년(1693) 봄 안용복은 동래어민 40여 명과 울릉도 부근에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같은 해역에서 고기를 잡던 일본어부들과 충돌하게 되었다. 중과부적으로 일본에 잡혀가게 된 안용복은 호오끼태수를 만났을때 "울릉도는 우리 영토다. 너희들이 함부로 고기 잡이 하는 것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또 에도막부로 이송되어 갔을 때도 같은 항의를 하여 막부로부터 울릉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승인하는 서계를 받아내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귀환길에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뺏기고 50여일을 갇혔다가 부산 왜관으로 옮겨져 또 40일을 구금됐으며 동래부사에게 인도된 뒤에도 공치사는 커녕 승인없이 월경하였다하여 도리어 형벌을 받았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여름 사를 받아 출옥한 안용복은 울릉도에서 돌아온 어부들로부터 일본인 행패로 도저히 작업을 할 수 없다라는 고충을 듣고 추격하다 옥기도로 들어간 그는 옥기도주를 만나 울릉도, 독도의 감세관이라 속이고 "다시 왜인들이 울릉도 근처에서 고기잡이를 하면 가차없이 죽이겠다"고 경고했다.

그는 대마도주의 야심과 죄상을 추궁하여 서약서를 받아 의기양양하게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강원감사 심평은 상은 고사하고 도리어 그들을 체포하여 한양으로 압송, 조정에서는 월경했다는 죄목으로 처형하려고 했으니, 이때 남구만, 윤지완 등 원로대신의 변호로 사형은 면하고 귀양을 가게되어 일생을 마쳤다.

이는 당시 조선조정과 대마도주간에 피차의 비합리적인 월경을 금지한 탓도 있었지만 조정의 외국에 대한 무지의 소치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안용복의 월경은 헛되지 않았다. 일본 막부에서는 안용복의 항의로 다께시마는 이나바에 속했다고 하나 아직 일본인이 거주한 일이 없고 또 거리로 볼 것 같으면 이나바로부터 1백 60여명리, 조선으로 부터 40여 리이니 조선 땅인 것이 명백하다고 밝히고 일본인이 울릉도에 나가는 것을 금했으며 그 뜻을 조선 정부에 통고하도록 대마도주에게 명했다.

독도에 대한 진정한 관심과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독도를 재발견할 수 있도록 독도를 지킨 인물을 통하여 독도를 올바로 이해하고 우리의 소중한 영토임을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는 내용입니다.